▲ (좌)History-1615, 75.2×75.2㎝ Mixed Media, 2016 (우)H-1613, 75.2×75.2㎝ |
손으로 문지르고 만진 흔적이다. 온기가 전해 오듯 흙벽의 희미한 난초 잎 하나가 잔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것을 분명 보았는데, 그림자였나! 긴 세월, 생성과 소멸의 내력에 몸을 감춘 듯….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어도 존재하는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 사람의 귀함이다. 사람이 가장 높이 치는 가치는 오히려 그렇게 몸으로는 느낄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참됨이 그러하고 아름다움이 그러하고 착함이 그러하고 거룩함이 그러하다.” <이문열 著, 선택, 민음사>
▲ 70.5×141.0㎝ |
한낮 뙤약볕을 고스란히 껴안은 구불구불한 얕은 강줄기는 속까지 훤히 드러내 보이며 흘러갔다. 간간히 휘돌아가는 물줄기는 찰랑찰랑 소리를 내기도 하여 무언가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백로 한 마리가 긴 다리를 쭉 뻗어 발을 담그며 첨벙거리는 소리를 낼 뿐 사방은 고요했다. 나른하게 졸고 있는 평평한 빈 들길엔 저희들끼리 미모를 시샘하며 피어난 코스모스가 인기척이 반가운 듯 활짝 피어 있었다.
그렇게 들길을 지나 조금씩 구불구불한 산길로 들어서자 뜻밖에도 헤진 무명치맛자락 뒤, 밭일로 굵어진 손마디를 감춘 산골아낙모습 같은 목장승이 서 있었다. 곤궁한 삶의 간소함처럼 텃밭을 일구고 자연의 순리대로 먹을거리를 거두며 살아 온 영락없는 여느 민초였다. 그 안내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막 넘어서자 아아! 가벼운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깎아지른 절벽을 끼고도는 강물이며 부채처럼 펼쳐진 들판이 한 눈에 들어왔다.
▲ (좌)75.2×75.2㎝ (우)72.7×81.5㎝ |
그리고 잠시 쉴 틈도 없이 물경, 산 속 어둠이 무엇이 급한지 서둘러 내려오기 시작했다. 성하의 숲은 무성하고 한줄기 바람이 휘익 지나간다. 누가 심었는지 아름드리 키 큰 수양버들이 암벽 위, 강가에 울창하게 들어서서 나뭇잎들이 어둑한 강물에 흔들흔들 비쳤다.
그때였다. 어디서부터 떠 내려왔는지 하얀 연꽃봉오리가 쓸쓸히 흘러가고 있었다. 울컥 아릿함에 조선중기 여류시인 이옥봉(李玉峰)의 ‘몽혼(夢魂)’ 시구가 달빛강물에 어른거렸다.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나요? 달 비친 비단 창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꿈속의 내 영혼이 자취를 남긴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 <로맨틱 한 시, 이우성 에세이, 아르테>
▲ 116.7×91㎝ |
◇자연에 새긴 시간의 정신성
퇴화된 흔적을 그리기와 지우기의 반복을 통하여 현대성으로 재창조해 온 비석, 비문, 암각화 등 사적지(史跡地)에 있는 역사흔적들을 단색조 화면으로 끌어안은 ‘History’연작은 지극히 다큐멘터리(documentary)적이다. 또 권 화백이 40여 년 동안 전국을 돌며 줄곧 답삿길에서 찾아내고 구현하고자 했던 발자취 또한 그러하다. 작업은 물에 불린 한지 등 종이를 캔버스에 중첩되게 눌려 붙여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데 물기가 건조되면서 무정형의 마티에르가 우연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 (좌)53.0×53.0㎝ (우)53.0×53.0㎝ |
먹을 비롯하여 작업칼 등의 도구로 비석이나 비문 등 수집한 자료들에서 얻은 영감을 독창적 조형세계로 그려나간다. “나의그림은 자연에 새긴 회화”라는 그의 말은 순리의 순환에서 응축된 한 여인의 연정, 가문, 지역 나아가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운이 서려있는 정신성을 포함한다.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연속선상에 있는 흔적들을 단색조의 입체비구상작업에 은유해내는 의상세계(意想世界)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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