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의철 作 traces of time 2024
85.0 x 85.0㎝, Mixed madia 2024
-권의철 : 作 단색화( Dansaekhwa )-
-신항섭 미술평론가 : 글
권의철(權義鐵)의 작품세계
점자 같은 질감 표현과
단색조의 색채이미지
신항섭(미술평론가)
동양의 그림, 즉 수묵화나 채색화는 서양의 그림과는 크게 다르다. 서양의 그림은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것을 요구하는 반면, 동양의 그림은 대상 또는 소재만을 묘사할 뿐이다. 그러기에 대상 및 소재 이외에는 비어 있는 채로 놓아둔다. 이를 여백이라고 하는데, 비어 있는 상태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비표현적인 공간이다 ‘비표현적’은 ‘표현적’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표현된 이미지에 대응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비어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표현된 이미지와의 상호작용한다는 얘기다. ‘상호작용한다’는 건 사유의 공간으로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권의철의 작업은 서양 회화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사유의 공간을 중시한다. 그의 작업은 재료 중심에서 보면 서양미술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한지와 수묵이나 채색 물감이 아니라 캔버스에 아크릴을 포함한 혼합재료를 사용한다. 화면을 빼곡히 채우는 것도 서양 회화의 특징이다. 표현된 이미지는 물론이고 표현된 이미지가 없는 부분에도 채색으로 메운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수묵화나 채색화와는 엄연히 다른 서양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왜일까. 그건 아마도 소재의 선택과 관련이 있지 싶다.
▲ 권의철 作 traces of time 2024
85.0 x 85.0㎝, Mixed madia 2024
그의 작업은 평면 위에 무수히 많은 작은 돌기가 화면 가득히 채워지는 형국이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연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마치 바둑판 모양의 규칙성을 띠는 화면 구조라는 아주 단순한 작업이다.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되는 화면은 전면회화의 한 형식적인 특징을 따른다. 특정의 이미지 중심의 화면이 아니라 같은 크기의 돌기 같은 이미지들이 연속적이고 규칙적으로 배열되는 단조로운 구성이기에 그렇다.
작은 돌기들은 저마다 그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돌기 가운데 닮은 형태는 하나도 없다. 이는 수작업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큐빅을 닮은 작은 돌기는 우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사뭇 의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게 구체화하고 있지는 않을지언정 무언가 의미를 부여한, 계산된 형태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정사각형 위에 물질이 쌓아 올려져 있는 형태의 돌기는 완전한 큐빅에는 이르지 못한 채, 큐빅에 근사한 이미지에서 머물러 있다.
이처럼 작은 돌기는 비석의 비문을 형상화한 것이다. 한 특정의 인물이나 한 시대의 역사 또는 왕의 치적을 기술한 내용을 돌에 새기는 게 비문이고 비석이다, 수천 년의 시간을 증언하는 비문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점에서 보면, 후세에 오래도록 기린다는 본래의 목적에 유효하다. 그가 비문에서 착상한 건 바로 반영구적인 세월을 거뜬히 견디는 영속성에 대한 고찰이었다. 그 자신 또한 비문에 필적하는 작품을 만듦으로써 영속적인 생명에 관한 욕망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관철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를 거듭한다.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구체적인 형상을 드러내는 작업이 있다. <History>라는 명제를 붙인 이 시기의 작품은 회색조의 단색에다 돋을새김과 유사한 기법으로 전통적인 문양을 새겨넣었다. 기와문, 당초문, 격자문에다 매화나 와당 문양을 조화시키는 일련의 작업이다. 이들 작업은 비록 디자인화하는 방식으로 구체적인 형태 묘사가 이루어짐으로써,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로서의 시각에서 멀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비석에 새겨놓은 비문에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자기혁신이 이루어진다. 형태가 사라지는 대신에 음각 한글체가 빈틈없이 빼곡히 채워진다. 훈민정음 글자체를 일일이 새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이 작업은 서예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붓으로 글씨를 써서 돌에 붙이고 글자를 따라 새기는 비문 제작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다만 돌이 아닌 캔버스 위에 건축재료로 쓰이는 분말을 물에 섞어 바른 뒤, 마르기 전에 글씨를 새기는 식이다. 이렇게 새겨진 글자는 밀집 구조를 형성하면서 전면회화 형식이 된다. 문자가 회화적인 요소로 등장한 건 20세기 초반으로, 부분적인 장식 효과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한글체의 집적은 현대미학의 전면회화 형식과 일치한다. 그러고 보면 문자를 조형적인 요소로 도입하면서 현대미학으로의 진입을 천명한 셈이다.
이로부터 점차 조형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문자이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른바 변주의 미학과 만나게 된다. 오랜 세월 풍화로 인해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가거나 마모되어 글씨를 읽을 수 없는 상태를 표현하는가 하면, 글자를 띄엄띄엄 배치하여 구성의 묘를 살리려는 의도를 보이기도 한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띄엄띄엄 배치되는 문자이미지는 마치 점자를 연상케 한다. 밀집된 구조에다 성글게 배치되는 구성으로 인해 글자 사이에 일정한 간격의 여백이 형성된다.
이처럼 일정한 거리, 즉 간격을 유지하는 규칙적인 화면 구조에다 여백을 둠으로써 사뭇 의도적이고 인위적인 조형이 강조된다. 또한 양각인 점자와 달리 독립적인 글자 하나하나는 음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음각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조형의 의미를 관철한다. 한글체는 글자이기 전에 조형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글씨를 새길 때 생기는 오톨도톨한 질감은 표현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단순한 글자의 나열이나 집적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후 또 한 차례의 변화가 나타난다. 띄엄띄엄 자리하는 글자가 다시 집적하는 형태로 바뀌면서 밀집 구조를 지향한다. 이전의 바둑판 모양으로 돌아가는 한편 세분화하면서 음각 형태의 글씨는 다시 점자 형태로 바뀐다. 아주 작은 점자 모양의 오톨도톨한 이미지가 정연하게 화면을 가득 채우는 구조는 그대로 질서의 미라고 할 수 있다. 연속성과 지속성을 동시에 갖는 돌기의 집적과 나열에서 질서가 지어내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글자 대신에 무수한 돌기가 지어내는 양각의 이미지, 즉 점자 형태의 이미지는 다양한 표정을 가진다. 즉, 돌기 하나하나는 저마다 높이가 다르고 그 표면 또한 불규칙하게 전개된다. 이는 건축재료로 쓰이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점성 및 점도에 따라 돌기의 높이와 표면의 이미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음각으로 새기던 글자가 사라지고 오톨도톨하게 불거지는 점자 형태의 돌기에 다양한 표정이 생기면서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정연하게 돌기 모양이 집적되는 가운데 질서를 깨뜨리는 파격이 들어서게 된다. 돌기들의 높이가 저마다 다르게 나타나면서 자연스러운 이미지가 형성된다. 마치 무너진 고대도시를 연상케 하는, 그런 세월의 풍파가 지나간 흔적처럼 보인다. 이는 그의 작업이 파괴된 이미지가 아니라 거꾸로 생성하는 이미지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무기질의 재료임에도 유기질처럼 보이는 자연스러운 표정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더구나 질서정연하게 돌출하는 무수한 사각형의 돌기들이 지어내는 생동감은 자연미에 일치한다.
그의 작업은 단색화의 범주에 든다. 단지 단일 색채로 마무리되고 있어서가 아니라, 작은 돌기의 집적과 질서는 한국 단색화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그대로 계승한다. 단색화가 성취한 미학적인 성과의 하나는 여백의 개념에 준한다는 점이다. 거기에 무엇이 표현되어 있든 간에 물질적인 텍스처는 표현적인 이미지가 된다. 여기에다 여러 번 반복되는 작업을 통해 돌기의 물질감은 중화가 된다. 단색조의 물감이 겹겹이 겹침으로써 본래의 질료적인 성격이 희석되고 물감의 존재감이 두드러지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색조의 색채이미지는 의식의 집중을 유도하는데, 바로 여기에 여백의 개념이 똬리를 틀고 앉는다. 다시 말해 단색조의 색채이미지가 지어내는 단조로움이 사유의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다. 사유의 여지가 있다는 건 여백의 의미와 상통한다.
각각의 색채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상징성이 있음에도 단색은 시각적인 혼란을 통합하는 힘이 있다. 다양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하고 수렴하는 기능이 단색이 가지는 힘이다. 작품마다 다른 색채이미지에서는 구태여 상징성을 찾으려 할 필요는 없다. 독립된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마다의 색채이미지는 고유의 정서를 내재함으로써 그에 따른 사색의 입구가 되기도 한다. 시각적인 이미지로서의 색채라기보다는 정서 및 의식의 활동을 매개하는 색채인 셈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
https://kwonec.tistory.com/m/7248990
-◇www.artkwon.co.kr
search share - 재발행 및 DB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