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의철(權義鐵)의 단색화(Dansaekhwa)
시간의 흔적(痕迹)-
되살림과 새로운 변용(變容)
글 - 김진엽 미술평론가
▲ History-1607, 53.0㎝/53.0cm mixed media 2016
권의철(權義鐵)의 작업은 최근 유행하는 ‘단색화’로 분류된다.
서구의 미니멀리즘을 토대로 형성된 한국의 단색화는 1930년
대에 출생한작가들의 전기 단색화, 1950-60년대 출생한 작가들
의 후기 단색화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기 단색화가들이 서양화의 양식에 한국 고유의 정신성을 담는
‘결합’을 모색하였다면, 후기의단색화가들은 재료나 방식, 양식
면에 있어서 조금 더 자유로운 형태를 모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단색화는 ‘단색조’라는 색조의 의미를 넘어 한국
현대미술의 독특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권의철은 작업은 후기 단색화로 구분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작
가가 추구하는 조형성이 후기의 단색화의 흐름과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조형적 방식의 모색에서 그러한 부분이 엿보이
는데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전기와 후기 단색화의 양상의 그의
작업에는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권의철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문자의 반복은 전기의 정신성과 후기의 실험
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나의 작업은 오랜 세월의 풍상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물
의 흔적에서 motive를 찾으며, 그 형태의 일그러진 형상과 물성의
원형질적인 현상 등에서 나의 심미안과 나만의 사유공간을 통해
발현되는 사고의 영역을 접목시켜 하나의 창작된 화면으로 표출
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작업은 언제나 역사물에 대한 실재하지
않는 의상의 세계를 꿈꾼다.”(작가 노트 중에서)
이러한 방식은 그의 성장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경
상북도 상주가 고향인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 흩어져 있는
비석 등의 역사적 유물들과 함께 성장하였다. 들판의 돌이나 풀처
럼 그러한 유적들은 그에게는 하나의 자연 환경이었던 것이다. 따
라서 그 유적들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보다는 정서적인 느낌으로
그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의 일련의‘ history’ 작업 시리즈는 어린 시절 그가 보아왔던
비문들의 형태가 담겨진 작업들이다. 다만 의미보다는 조형적 문
맥에 따라 문자들을 배치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텍스트의 가
독성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한국 단색화의 특징인 반복의 한 형
태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특징적인 것은 문자의 조형적 형태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거의 문자들이 가지는 정서적 의미
도 그의 화면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정서까지도 조형적 맥락에 따라 자유롭게 구성되는 것이
다.
단색화의 반복이 단순한 조형적 차원이 아니라 내면으로 침잠하
는 느낌을 준다면 권의철의 반복은 내면으로의 회귀로 한 단계 더
진전된 상황이다. 즉 내용의 문맥을 통한 정서적 회귀가 아니라 본
질적인 환원 즉 의식으로 향하는 것이 그의 작업의 중심이다. 비록
정서적 회귀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단순한 회상의 상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즉 과거의 미감으로 복귀가 아닌 과거의 미감마저도
새로운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이 권의철의 특징이다.
따라서 권의철의작업은 과거의 반복이나 재생이 아닌 현대적 미
감을 통해 과거를 복원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대상’의 단순한 감정적 차원을 넘어서 인식론적
차원으로 나아간다. 과거는 단순한 감상이나 회상의대상이 아니
라 현재를 통해 새롭게 정의되는 것이며 우리의 현재에서도 여
전히 숨 쉬고 있는 존재적 차원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권의
철의 단색화는 기존의 단색화들과는 다른 경로를 모색한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홍익대 동양화과에 입학한 이후 46년간 한국화 입체
추상서의 새로운 모티브의 제재, 질감, 형태, 먹의 변주에 의한 흔적
의 효과, 반점, 화선지의 팽창과 수축의 변화... 등에 대해 추상회화
적인 내용을 지닌 발상의 전환과 함께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어렵고
힘든 순수 작가의 길을 택해 현대적인 실험을 위주로 한 입체 추상
적 작업에 임하였다.”(선학균 평문 중에서)
권의철은 한국화의 입장에서 단색화의 방향을 정한다. 한국화의
재료와 다양한 매체를 혼합하여 단색화가 가지는 평면성을 심도 있
게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조형은 단색의 변조와 문자의 결
합을 통해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는 실험이었다. 작품 제작
과정에서 나타나는 조화 비례, 균형 등의 추상적 요소와 화면에서
의 필세, 방향, 속도, 강약 등의 요소가 접목이 될 때까지 그의 화면
은 계속 수정된다.
추상적 요소와 한국화의 기운생동이 어우러지는 것이 권의철 작
업의 핵심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서정적인 형태 보다 산문의
형태에 가깝고 은유적이라기보다 환유적이다. 따라서 그의 화면은
본질 속에서 나타나는 근원적인 형태들이 그의 치밀한 박업 방식에
따라 배치되는 것이다. 특히 권의철의 단색화는 단순한 평면성을 지
향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의 형태처럼 융기하고 있다. 평면 속으로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여 다시 융기하는 것이 바로 그
의‘ 입체 추상화’인 것이다.
‘입체 추상화’는 의도된 형태에서 구성된 것보다 작가의 계속적
인 실험의 반복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동양화의 정신적 추상성과
서구의 조형적 추상성이 결합되어 나타난 이러한 조형 방식은 단순
한 예술 방식의 의미를 넘어 문화적 맥락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런 식의 맥락에서 보면 권의철의 작업은 단색화를 넘어 한국 현
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탐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용적 서정성과
추상의 엄격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그의 화면은 한국 추상미술의 맥
이 끊어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의철의 예술은 그가 추구하는 담담한 일상의 평범함에서 나온
다. 그의 말처럼 부귀영화나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그가 평생을
추구한 예술에서 인생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과거 시대의 흔적들
에서 자신의 심미감을 터득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대미술의 새
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것은 꾸준한 열정과 사명감이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이었다. 또 대다수 화가들이 구상작업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려고 하는 환경에서, 단색화를 바탕으로 엄격한 추상의 세계를
구도자의 자세로 추구하는 것은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최근 한국미술에서 작가가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마 그
것은 작가들의 생명이 짧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에 대한 확신과 세태에 대한 관심 때문에 오히려 작업의 발전이 없
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권의철의 작가혼은 놀라운 것이다. 평생
을 한 눈팔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추구해 온 엄격한 예술의 길
은, 단순히 화가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충분히 존경받을 만
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History-1605 85.5×85.5cm mixed media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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