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와의 대화

" 주문진 바다" . . . 金南珠 (수필가)

kwonec 2014. 10. 31. 10:19

                                       

 

                                                         수필가 金南珠

 

                                                       " 주문진 바다"는  현대수필 문인회의 2014년도

                                                          동인지에 실린 글이다 -

 

                                                                           삽화 -權義鐵 作 h-1419

 

주문진 바다

 

                                                                김남주

 

봄이 정신없이 흔들린다. 꽃들도 미쳤나보다. 우아하게 자태를 드러낸 목련이 떠날 차비도 하지 않는데 벌써 아파트 담장에 노란 물감이 퍼졌다. 그 옆으로 바람이 슬쩍 인사를 하더니 꽃비가 내린다. 정말 봄인가, 꽃들이 잔치를 하는가 어지럽다. 이 좋은 계절 3월 18일에 백내장 눈 수술을 하였다. 봄을 한껏 밝게 보겠다던 기대는 ‘찬란한 슬픔의 봄’이 되어 한꺼번에 다가왔다. 남편이 장염으로 4박 5일 병원 신세를 졌으니 말이다. 그뿐인가, 5월 12일에는 내게 흉부외과 진료가 예정되어 있고, 결과에 따라 심장박동기 삽입 수술을 받아야 한다. 마치 비에 젖고 바람에 휩쓸린 꽃비처럼 4월은 잔인한 달이 된 것이다.

각각의 꽃들이 계절에 맞추어 피워야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뽑낼 터인데 여기저기 한꺼번에 피고 져버린 봄꽃이 우리 부부 같아 보였다. 남편이 퇴원을 하고 십여 일만에 예정 없이 훌쩍 주문진 바닷가로 떠났다.

4월 10일, 한가로운 시외버스를 탔다. 강릉을 거쳐 주문진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30분. 거의 40여 년 만에 찾은 주문진항과 바닷가는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주문진항에서 생선구이 점심을 먹었다. 볼락, 임연수어, 꽁치, 고등어 등 네 종류의 싱싱한 생선구이는 2인분이 2만원이었는데 노릇하게 먹음직스럽게 구워 큰 접시에 담아내니 어찌 다 먹을까싶다. 몇 가지 반찬과 젓갈류를 더해 한 상 가득한 점심상은 보기만 해도 푸짐하고 맛깔났다.

주문진항 양 옆으로 해산물 가게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정갈하다.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좁은 도로 위를 분주히 달리고 택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원활하게 관광하고 소통하도록 택시는 불러야 온다며 식당주인이 설명해주었다.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참 괜찮은 정책인 듯싶다. 콜택시는 5분도 못되어 식당 앞에 도착했다. 숙박할 콘도가 시외 바닷가 쪽이었는데 택시비는 미터기에 표시된 금액대로 받았다. 우리나라 관광지의 관광 예절과 올바른 상도商道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지난 세월들, 큰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그 아래로 4학년, 1학년 세 아들과 함께 주문진으로 여름방학 가족 여행을 왔었다. 남편의 동료 선생이 소개해 준 민박집은 허름한 것 같았지만 동네에서 괜찮은 집이었다. 불볕이 내리쬐는 바다를 향해 아이 셋이 겁 없이 뛰어들고 민박집 주인이 조그만 어선(어선이라기에는 너무 작다)을 갖고 와 우리 주위를 돌며 남편과 홍합을 땄다. 큰애와 둘째는 서투른 자맥질로 배 근처에서 어쩌다 딴 홍합을 들어 보이며 기뻐하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날 양동이 한가득 따다준 홍합을 한꺼번에 삶아 주인집과 잔치를 벌였던 기억이 어제같이 선명하다. 주문진에서 찾아낸 추억 한 자락이 꿈결같이 스친다.

콘도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가볍게 바닷길로 나섰다. 아직은 사람이 찾지 않은 빈 바닷가! 파도가 쏴아 넘실대며 찾아왔다 물러간다. 세 아들은 이미 제 가족을 거느리는 가장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나 있고, 부부는 예전처럼 둘만 남아 호젓하다. 바람이 간간이 불어온다. 파도가 하늘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는지 잔물결을 일으키며 조용히 몸을 흔든다.

4월의 바다는 인적이 없어 모래알처럼 쓸쓸하다. 까마득하게 멀리 보이는 수평선이 포물선을 그려놓고 밀려오는 파도를 마시며 뱉으며 살아 있음을 고한다. 조금씩 해가 기울어간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포개지다가 둘로 나누어지고, 짧았다 길어졌다 흐르며 퍼진다. 서서히 불덩이가 마지막 장막을 펼쳐놓고 신음하듯 떨어진다. 그제서 서녘은 아름다운 분홍빛 여운으로 잔잔하다. 삶도 저같이 불덩이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 분홍색 노을처럼 조용히 스러져야 아름다울 것 같다.

팔짱을 낀다. 결혼 전에는 수줍어 잡지 못했던 그의 옆구리, 칠십이 넘은 지금 당연한 모습이 되었다. 세월에 기대어, 연륜에 힘입어 연출해내는 이 모습이 서로를 의지하는 믿음의 표현이리라. 가끔씩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들 하지만 장년층에게나 쓸법한 격려의 뜻일 뿐 실제로 ‘나이는 숫자와 평행’하고 있다. 머리와 가슴이 아무리 숫자에 불과하다고 몸부림치며 우겨대도 몸이, 신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숫자에 불과하다’고 한 말은 몸에 대한 자만이었고 세월에 대하여 오만하기 그지없는 생각일 뿐이다.

여기저기 부서져 내리는 몸의 소리를 듣는다. 노래처럼 들려온다. 그러나 망망한 이곳 주문진 바다는 영원히 세월과 동행하고 있다. 수많은 고기 떼와 생물을 끌어안고 영원으로 이어진 평화로운 품이다. 때로 폭풍이 몰려오고 태풍이 삼켜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바다. 여름이 오면 새로운 희망의 물결들이 바다를 찾아오고 바닷가 모래밭에 각자의 꿈을 쌓으며 안식과 평화를 찾을 것이다.

오랜만에 남편과 하나로 찾은 주문진 바닷가!

병원과 등지고 짧은 삶으로 남을 이 순간이 편안하다.

봄꽃이 미련 없이 흩날리는 봄날, 겹겹으로 파도가 넘쳐와도 주문진 바닷가의 노을은 장엄하다. 오늘은 오늘로 충실하리라. 내일은 새로운 꿈을 꾸며 주문진 바닷가에서 삶의 위로와 마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