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성 의상(意象)을 현대적 회화로 표출
- 궤적 형상을 상상(像象)이라는 의식적 감성에 의해 파악 -
朴 明 仁(미술평론가·한국미학연구소 대표)
화가는 대상의 상에 대해 필연성만을 표현하려고 하면 작가적 개성이 결여된다. 사물의 정상(情狀)을 감각으로 파악하고 내외적인 특성을 화가의 의상(意想)에 의해 표출해 내야 한다.
특히 한국화(동양화)에서는 먹의 특성을 절대적으로 강조하지만 권의철은 극히 소량의 먹을 사용하는 점이 다르다. 또한 나무나 우드락폼보드와 같은 특수 소재에 아크릴을 사용한다. 이러한 회화적 행위는 이미 한국화라든지 동양화라는 장르 구분을 초월하여 회화적 영역을 광의적으로 넓혀 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권의철은 이러한 제한적 소재로부터 벗어나 고대문명으로부터 문화성, 예술성을 이끌어 내어 현대화하고 있다. 그리고 시기를 상징하는 수상(數象), 사물의 이치나 질 또는 근본(根本)을 상징하는 내상(內象), 사물의 결과로서의 외상(外象)에 의해 파악하고 자신만의 표상을 만들어 낸다. 일례로, 한 개의 나무토막을 놓고 관상하면서 무슨 나무일까(外象), 몇 년이나 자랐을까(數象), 어떻게 자랐을까(內象), 이것을 나무토막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言象), 이 물질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意象)라는 다각적인 사유에 의해서 대상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동양화론에서는 물체가 상(象)을 띠고 있으면 기(氣)와 세(勢)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서양의 미술에서도 기와 세는 존재한다. 그것이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론에 대입해 보면, 권의철의 《History》라는 명제로 추구하고 있는 작금의 작품들은 흰색을 기조로 하는 모노크롬 형식의 평면에서 부조적 음양각으로 표출하고 있는 문자체(역사성)을 기라고 할 수 있고, 암각화 등에서 도입된 형상에 담긴 고대인의 의상(意想)을 추정하여 형상화하고 있는 이미지(현대성)가 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성 이미지의 내재적 의미를 외상, 수상, 내상, 언상, 의상, 상상 등의 감성으로 파악하면서 기와 세를 판단하는 것이 History의 정체성인 것이다.
여기에서 모노크롬 형식의 평면구도는 생리적으로 원근감의 부정이라고 말하기 쉽지만 권의철의 화의(畵意)는 다르다. 공간을 매우는 부조적 평면화에서 문자체나 암각화같은 내재적인 이미지가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외적 세계를 표면화하지 않고 색면의 관계구조를 표현영역으로 확충한다. 그런가 하면 역사성을 회화적으로 사실화하고 있어서 현대성과의 조화에 의해 작가의 화의가 충만한 총체적 회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흰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혹자는 흰색은 무색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흰색이야말로 무한한 색의 신비를 지닌 색의 원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흰색에 의해 모든 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색채학적으로 말하면 광학의 색의 합은 무색이고 물리적 색의 합은 흑색이 된다. 따라서 회화에 있어서 색의 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가 흰색인 것이다. 결국 흰색과 흑색은 색의 총체성이라는 결론이고 이를 응용한 권의철은 먹에 흰색을 가미하는 것이 아니라 흰색에 먹(흑색)을 가미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경향은 이미 한국화를 전공한 권의철의 의도가 이미 동서양의 벽을 일탈하고 회화적 안주에 이르렀다는 입증이다. 그것은 색채학적 특성뿐 아니라 동양의 유구한 역사적 이미지를 모티브로 하고 현대적 기법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회화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각적 공간에 은유되어 있는 역사성의 강조는 그 형체에서 보이듯이 어제와 오늘의 제한적 이미지가 아니라 무한한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시간의 연속성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 역사적 물상인 것이다. 풍화작용에 의해 형태가 변형되고 물리적으로 손상되기도 하면서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자연의 물상의 변천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그 형상에 따라 시간성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권의철의 작품 이미지에서 관찰할 수 있는 역사성 물상은 시간의 무한성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문자의 형상이나 암각화의 물상들이 은유하고 있는 시간성은 바로 수 천년의 역사를 예측하기에 충분하고 오늘에 와서 그러한 역사적 이미지가 과거인과 현대인의 표상으로 비교될 때 인간의 원초적인 이상(理想)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인으로서의 사유는 ‘20세기 문화예술이 환원적 정열에 불타고 있다’라고 하는 미술사적 관점과 맥락을 같이 한다. 20세기는 미술뿐 아니라 예술, 사상 전반에 있어서 환원적 정열이 여러 가지 행방을 모색한 시대이다. 환원이란 문자를 통해 원(元)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론적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인생을 절반을 지나온 우리가 청년시대를 돌아보고,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싶어하는 것과 같다. 그러한 환원적 생각을 인간은 문자로 표현하고 문자의 기록에 의해 과거의 정황을 이끌어 내어 새롭게 조명하려고 한다.
권의철의 문자형상은 이러한 20세기 문화예술사상에서 타오르던 정염처럼 환원적 개념에 의해 과거의 먼 이야기들로 집약된 문자를 형상화한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기세에 미적 체험을 자신만의 회화영역으로 구축하고, 정신적 사상(事象)은 감각적 대상을 그 표현체의 의미로서의 역사성 물상으로부터 주제화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유발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창조적인 상징성으로써 다의적으로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그 다의성은 상징적 사유로부터 현출(現出)되어 언어와 조화를 이루는 추상회화로서의 강렬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게 된다.
이제까지 권의철의 작품을 통해 분석해 본 여러 정형을 보면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형상이 일체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 오감(五感)에 의해 감각적으로 지각한 미적 체험을 토대로 환경이 되는 시대나 문화의 성질을 파악하면서 형성되고, 직관(intuition), 향수(enjoyment), 관상(contemplation) 등이 특별한 양태(樣態)를 만들어 내면서 창조성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이 미술에 있어서의 미적범주(aesthetic categories)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History》를 작품의 명제로 삼고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권의철의 회화성은 역시 비문이라든지 암각화 등의 역사적 궤적으로부터 미적범주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니까 비문이나 암각화를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물상으로부터 시각적으로 제일 먼저, 역사성, 예술성을 창조적 모티브로 표현하고 있는 권의철의 회화양식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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